류시화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최근 며칠 동안 루틴이 급격하게 무너졌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이 바빴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죠. 폭식도 했고요. 이젠 몸이 금방 반응하는 나이가 됐습니다. 컨디션이 정말 엉망이었고 결국 이삼일 심하게 앓을 수밖에 없었죠. 겨우 몸을 추스르고 어제부터 다시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공기 속을 걷고, 마트에서 채소를 사와 음식을 만들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조금씩 컨디션이 돌아오더군요. 예전엔 뭔가 안 좋을 땐 그 해결책을 새로운 것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 방법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들은 지평선 너머 먼 곳이 아니라, 책상 위와 새벽의 산책길, 동네 슈퍼마켓의 채소 진열대, 저녁의 두부 가게에 있더군요. 당연한 것들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중입니다.



달리기를 축으로 한 문학과 인생에 대한 하루키 최초의 본격적인 회고록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 관조적인 고백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서문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 계속 달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생각하거나 자문자답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무슨 일에나 품을 들이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달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손을 움직여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만트라 Mantra : 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그대로 꺼내 솔직하게 나 나름의 문장으로 써보자. 아무튼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겠다’
나의 ‘지금의 기분’을 그대로 기록했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으로 읽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해도, 어떤 종류의 경험칙(관찰과 경험에서 얻은 법칙)과 같은 것은 얼마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 자신의 신체를 실제로 움직임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잘 응용할 수 있는 범용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

제1장 누가 믹 재거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제1장 누가 믹 재거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 일주일에 60km 달림
  • 하루에 10km씩 6일(하루 평균 10km! 일주일을 주기로.. 오늘 5, 내일 15도 가능)
  • 한달에 260km
  • ‘착실하게 달린다’

데일리 루틴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제2장 사람은 어떻게 해서 달리는 소설가가 되는가


가게를 경영하고(장부를 적고, 주문할 물건을 점검하고, 종업원의 일정을 조정하고), 나 자신도 매일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이나 요리를 만들고, 한방중에야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와 부엌 테이블에 앉아서 졸음이 밀려올 때까지 원고를 쓰는 생활을 3년 가까이 계속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시기는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종합적인 교육 기간 같은 것이었고, 나에게 있어 진정한 학교였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었다.
학교라는 데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배운 후에는 나와야 하는 곳이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는 없다’
가게를 경영하고 있을 때도 대체로 같은 방침이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상당히 좋은 가게다, 마음에 든다, 또 오고 싶다’라고 생각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거꾸로 말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경영자는 명확한 자세와 철학 같은 것을 기치로 내걸고, 그것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비바람을 견디며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내가 가게를 경영하면서 몸소 체득한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것으로 보통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부족할 게 아무 것도 없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이다.

제3장 한여름의 아테네에서 최초로 42킬로를 달리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제4장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간호사가 맥박을 재는데 언제나 “아, 당신은 러너군요.”라는 말을 듣는다. 장거리 주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모두 비슷한 맥박수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제5장 만약 그 무렵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쌓인 눈은 밤사이 거대하고 미끌미끌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로를 떡하니 막아버린다.
우리는 달리는 것을 단념하고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별 볼일 없는 사이클 머신을 타고 체력을 유지하며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많은 물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위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인간에게 있어서’라는 것은 약간은 과장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 동안 물을 보지 않고 있으면 내가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바닷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사실도 얼마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나는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불건전한 영혼은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한다.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젠가 사람은 패배한다. 육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쇠잔해간다.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그 지점을-결국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소설가로서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저런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누가 말한다 해도 나는 계속 달린다.

제6장 이제 아무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100K 울트라마라톤
출발해서 55킬로가 되는 휴식 지점(레스트 스테이션)까지의 구간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할 만한 것은 없다. 그저 묵묵히 달리기만 했을 뿐이다. 일요일 아침의 장거리 달리기와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75킬로 근처에서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갔다. 그런 감각이 있었다. ‘빠져나갔다’라는 말 이외에 그럴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아무것도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라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라는 말이다.
피로에 지쳐 있다는 것이 ‘늘 그런 상태’라고 하는, 이른바 상태로서 내 안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 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제7장 뉴욕의 가을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레이스를 즐기는 것.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내 목표다.

제8장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언제나’ 그렇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경험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우울한 소식인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배달부는 모자에 잠깐 손을 대고 어쩐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가 전해주는 소식의 내용이 조금도 나아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배달부 탓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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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우리는 두 번째 계획이 필요하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의 나의 성격인 것이다.
전갈이 쏘는 것처럼,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원앙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처럼.
그것이 나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록키>의 테마곡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등을 지고 걸어갈 석양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천용 운동화처럼 소박한 결론이다.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제9장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는 않았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수순으로 정해진 말을 써서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있어도,
상대를 보고 상대의 능력이나 경향에 맞춰서 자신의 언어로 어떤 사물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많지 않다, 라고 할까.

살아있는 한, 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은 있는 것이다. 발가벗고 거울 앞에 아무리 오랜 시간 바라보며 서 있는다 해도 인간의 속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다.
(달리는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

나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지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과는 마음 편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고 예상 밖의 일이 발생했어도, 일단 골인해버리면 모든 것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기는 달리는 것을 통해 살아있다는 것이 ‘행동(행위)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그것도 하나의 인생일 것이다.

묘비 문구
‘무리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 후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 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비교적 온건한 단게에 나 자신을 머물게 하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타이틀인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 책 제목의 원형으로 쓸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준 테스 갤러거 부인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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