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 피우려거든 그대여,
생명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이 지나가고 난 뒤의
쓸쓸한 고요함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 도종환.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리  (0) 2023.01.13
상처  (0) 2022.10.01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기술  (0) 2022.09.22
즐거운 편지 - 황동규  (0) 2022.09.1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2022.09.09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  (0) 2022.10.01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0) 2022.09.29
즐거운 편지 - 황동규  (0) 2022.09.1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2022.09.09
최재천의 아마존  (0) 2022.08.23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0) 2022.09.29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기술  (0) 2022.09.2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2022.09.09
최재천의 아마존  (0) 2022.08.23
별의 먼지  (0) 2022.07.31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인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 3권 3호, 1938년 3월호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기술  (0) 2022.09.22
즐거운 편지 - 황동규  (0) 2022.09.19
최재천의 아마존  (0) 2022.08.23
별의 먼지  (0) 2022.07.31
전영관 - 분갈이  (0) 2022.06.03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거운 편지 - 황동규  (0) 2022.09.1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0) 2022.09.09
별의 먼지  (0) 2022.07.31
전영관 - 분갈이  (0) 2022.06.03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0) 2021.01.15


come close, my love
let’s cherish each other
before you and me
suddenly cease to exist

- Rumi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이명수 강의

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docId=61963564&qb=7ZWc67mE7JW8IOyerOuCnOychO2XmOqwkOyGjA==&enc=utf8&section=kin.ext&rank=2&search_sort=0&spq=0

 

한비야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님이 지식인에 묻습니다

인물정보* 프로모션 성격 및 질문 내용과 관계없는 답변과 의견은 사전 경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습니다.

kin.naver.com

 

한때는 작은 변화라는 것을 신봉했었습니다. 이 세상은 한명의 개인들, 개인들로 이루어진 곳.  그렇기에 그 한명의 개인들 개인들은 서로에 대하여 관계맺기를 통하여 연결 된다면, 놓여있는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의 평화로운 사회를 이룰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지금 북한 어딘가에 살고있을, 20살 즈음의 마르고 약간은 신경질적이지만 가족을 챙기는 남성은, 지금 이렇게 두런거리는 저와 아무런 원한과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곧바로 서로 만난다면, 우리는 서먹해도 그럭저럭 잘 지낼수 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친한 사이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태어나기 이전에 놓여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을 쏘게 됩니다. 서로가 이유없이, 서로가 무서워 하면서.

만일 우리 모든 사람 하나 하나가,  '왜 그래야 하지?'란 의문을 갖고,  결국 서로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 그 파괴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 서로를 향한 적대가 사라진다면, 한명의 이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연결된다면, 우리 모두는 국경 없는 지구에서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가지게 되겠지요.

아, 얼마나 멋진 세상이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성원 하나 하나의 살아있음을. 서로를 존중함을. 그렇다면 더 이상의 기아는, 아니 모든 슬픔은 자연에서 주어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고, 만들어내어진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은 더 이상 없겠지요.

그런데 슬프게도 이런 생각은, 모두가 조금씩 발전해나아가는, 개인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밑으로 부터의 변화는, 가능성은 있어도 언제까지나 가능성으로 밖에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우선하거든요.

생존욕구.

쾌락 과 고통. 이 두 가지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자기보존을 위한 본능적인 감정은 문화와 교육이 아무리 덧칠해도 남아있을 기본 뼈대입니다. 이것을 포기한 사람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이겠지요.

배가 고프니까 무언가를 먹습니다. 그 아픔을 무언가가 상회한다면 굶어죽게됩니다.

혀가 즐거우니 어떤것을 먹습니다. 그 즐거움을 다른 것이 상회한다면 그것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바램을 타인에게서 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관계 맺고,

자신의 후손에게서 자신의 연장을 봅니다.

 

보다 나은 생존을 위해 개인간은 대립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쟁에서 발생되는 것이 모든 인위적인 재앙이겠지요. 기아를 포함한 전쟁, 아니 소외를 비롯한 자살, 이 모든 폐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명의 개인이, 굶고 있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한달분의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는 것은, 사실 그것을 통해 그 개인이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이지만, 그 개인은 그 행위를 통해서 만족을 얻습니다. (도덕이라는 것도 종의 생존유지 가능성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 이전에 그 돈을 보낼 수 있는 개인이 기반한 사회가 그 기아라는 인위적 재앙에 몇번에 걸쳐 연결된 보이지 않는 협력자입니다. 결국 그의 쾌락은 그 피해자를 기반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지원을 하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는 아닙니다. 단지 끝임없는 보수를 필요로 하는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생력이 결여 되어 있는 사회에, 구조적 결함의 사회에 단지 아이들만을 먹여 키워낸다는 것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고통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수탈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구의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요? 결국 앞으로 돌아갑니다. 개인의 인식을 통한 변화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언제까지나 그 가능성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가능 할까요?

과거에 완성되는 개개인의 참여를 통하여 구성되는 사회, 즉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북미 원주민들이였죠. 하지만 파괴적인 서구사회와 접촉하게 되어 인종청소에 가까울 정도로 학살당해서 붕괴되었습니다.  신뢰는 한쪽만이 가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슬프게도 사람은 납과 철을 이기지 못하니까요.

굶고 있는 아이들을 도울수 있는 것은, 당장의 지폐 쪼가리가 아니라, 그 원인이 연결되어 기반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당장마저도 시급한 상태라, 눈에 가득차는 그 비극의 현장을 외면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필요로 하는 것은 TV프로에서 '얼마얼마가 모였습니다!' 라고 외치는, 실제적으로 얼마가 돌아가고 사라지는 알 수 없는 것, 일회성의 쇼 보다는 그 사회에 기반하는 문제점의 해결. 네,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큰 쾌락을 위한 사회구조에 묶여 개선이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보다 최소한의 조치는 자생적 순환구조가 가능한 각 지역에 따른 발전 방안만이 해결책 입니다.

전에 보았던 다큐멘타리가 생각나는 군요.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어 파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도입이후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나무를 잘라 불을 지펴 소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삼림은 순식간에 황폐해졌고, 그에 기반한 수렵은 엉망이 되고 환경도 변해 갔습니다. 그런데 삼림을 절대적으로 보존 시켰던 한 지역에서는, 외부의 도움을 통해 태양열을 통한 간단한 증류용기를 도입해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뭐, 더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는 군요.

전자가 전형적인 잘못된 개선입니다. 후자가 각 상황에 맞는 자생적 구조의 수립이 되겠군요. 전체 틀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각 하부구조에 개입하여 개선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계속 유지 되겠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이익(쾌락)을 위하는 더 강한 구조에 부딪힌다면 붕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땜질식의 악순환은 보다 장기간 동안 끊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당장의 빵이 아니라, 그 빵을 위한 곡물을 기르고 먹을, 당신과 동일한 존재로 서서 마주하기 위한 기반입니다. 그들은 불쌍한 존재로, 당신의 아래에 있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이니까요.

 

----

배고픈 아이들 하면 당장 떠올리는 것이 구 식민지 지역의 아이들이지요. 혹은 내전지역의 아이들. 그러나 그곳만 그럴까요? 가끔씩 기사 한켠에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언급되곤하죠. 방학중에는 그마저도 굶어야 하는 아이들. 국내에서도 쌀은 남고 있고, 먹을 것도 얼마든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썩어 문드더지더라도 무료로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 사회구조의, 정확히는 자본주의의 규칙입니다.  그 규칙은 이 구조의 기본 뼈대이므로 한 개인의 의사에 의해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대공황시기의 미국은 수확한 오렌지에 석유를 부어 썩혔고, 돈이 없어 떠도는 가족들은 굶어서 쓰러졌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였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흔한 사건이며, 단지 그럴것 같지 않은 곳에서 대량으로 일어난 하나의 사례에 불과 합니다. 얼마전에도 가난에 의해 국적이 말소된 분이 굶어 죽은 채로 발견 되었고, 5살난 아이가 굶어죽은채로 발견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과 나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당장의 나에게 이건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에 불과하고, 잉여를 소지한 자의 유흥에 지나지 않지요. 한 존재의 절박함은, 다른 존재에게는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그의 생존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한. 그것은 그저그런 사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한 개인의 죽음이라는,  한 우주의 종말은 나에게 있어서 '왜 오븐에 넣고 구운 푸딩이 계란찜 같이 되었나?' 정도의 무게 밖에는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주제의 소비는 잉여소비의 중심에 있는 학생들 뿐이겠지요.)

만약  '1분간 인터넷을 끊는다면 1명의 배고픈 아이가 그 1분간의 비용으로 생명을 보존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것에 공감한다면 처음 몇 십분간은 그 말을 듣고 인터넷 선을 뽑겠지요. 그러나 슬금슬금 쾌락충족의 욕구가 고개를 들고, 이제 상상속의 그 절박한 한명의 아이의 중요성은 수그러들고, 심심함과 따분함이 보다 마음속을 차지 합니다. 그리고 곧 보이지 않는 아이는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애초에 그 아이와 나와의 연결점은 없었으니까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언제까지고 도울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에 반대하는 행위니까요. 아이들에게는 기꺼이 도움을 주겠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라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이제 도움자는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와의 생존 경쟁에 합류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을 굶게 만들은, 그들의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자신은 결국 자신이 일으켜야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자립할 기반의 마련이 필요 합니다. '남는 음식을 주어야해요' 라는 같은 의견과 행동은, 그 사회의 외부 의존형태를 더욱 악화시킬 따름입니다.

전체 사회 구조의 개선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식량과 교육을 함께 생각하기 시작했더군요.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표준화된 개선방안도 잘못된 방법입니다. 각 지역과 상황에 맞는 개선 방안은 결국 그 소속된 구성원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고, 외부개입에 의한 일괄적인 개선은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했던 순환구조를 부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외부개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특화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자립적순환구조로의 복귀입니다. 그 대표적 방식의 예가 '오래된 미래'에 나오는 라다크 지역이겠군요. 이것은 불안한 완성이지만, 그곳에 외부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은 유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왜 아이들만이 반드시 굶지 않고 먹어야하나요? 그렇다면 아이들이 자란 후 어른이 되는 어느 순간, 방치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는 한 개인으로써 생산능력은 갖추었지만, 그 능력은 사용되어질 곳이 없기에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기에 생명을 연장한 그 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을 가지게 됩니다.

단순한 물질 지원에 의존되어 유지되는 사회구조는 그렇기에 잘못된 행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 나라 이야기 뿐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겠지요. 단순히 삶이라는 고통을 연장 시키는 것만이 아님을 위한.

그렇다면 한편으로 언급되는 강제적인 부의 재분배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해결할 실마리일까요? 하하, 설마요. 생존가능성 확대를 위한 부의 축적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누가 고통을 감수하며 일하려 할까요. 그랬던 곳이 한군데 있기는 했었죠. 에바 페론시기의 아르헨티나. 매일 아침 빵과 우유가 전 국민에게 배달되는, 권력집중의 독재가 이룰수 있었던 하나의 환상이죠.

상위 몇 %에 집중된 부의 탈취와 재분배라는 거창한 생각은, 그 자신이 그곳에 소속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 올거라는 생각과 보다 상위의 경쟁자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욕망으로.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생존에 유리해지기에, 본능적인 긍정의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잉여의 소비자라는 자각을 좀 가졌으면 좋겠군요.

할일 없이 서핑을 즐기며 사용하는 소모비용은, 그리고 이를 위한 기반 시설은 결코 값싼게 아닙니다. 이러한 곳에 참여할 여건이면, 이미 지구상에서 충분히 상위권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것을 분배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에는 인터넷이란 그리 필수적인 것이 아니고, 밥을 충족하게 먹을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만한 것이지만, 연속성에 의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 행위를 요구하는 가르킴이 자신에게 돌아오면 거부감이 생깁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니까요. 천원정도는, 만원정도는 내줄수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은 좀 곤란한 걸... 은 당연한 인식입니다.  만족을 위한 허용치가 넘어버렸으니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생존이니까요. (이타적행동이 자신의 쾌락으로부터 유발된다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죠) 이것을 부정하고 싶으신 분은 자신의 속해있는 집단 총자산의 1~2%, 평균적으로 한 1천만원에서 2천만원 정도를 이 자리에서 기부하시기 바랍니다.

커피와 담배는 아이들의 노동과 생산지의 착취, 자립적 생활을 위한 식용작물의 생산과 순환구조를 파괴하는 작물입니다. 하지만 스타벅스에 들어가 꺼리낌 없이 홀짝거리면서  '기아문제가 큰일이야' 라고 합니다. 전 지국적인 물부족을 해결하기위해 수세식 화장실을 철거한다면 기겁을 하겠지요.

사회구조의 문제는 결국, 사회구조의 변화로 해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본성과 연결되어지기에, 利他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동등한 가치를 갖게되는 하나의 존재로, 버려진 강아지처럼 도움받아야할 불쌍한 생명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같은 인격체로 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립되어야할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 가능성을 보이기에,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악순환을 고리를 끊기위한 소규모의 독자적 사회구조 생성. 그리고 이것은 각 상황과 조건으로 적합하게 이루어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곳이 대한민국이건, 북 아프리카건, 남미이건 간에 단지 불쌍히여겨 거두어 먹이는 것 이상의 동등한 객체로서의 존엄. 그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굶주림은 단순히 따로 분류하여 생각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그릇된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만을 고치려하니, 해결되지 않을 수 밖에요.

 

 

---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2020) 한비야,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 푸른숲 280.p

'구호활동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먼 임시방편, 일회용 밴드식 사업은 아닌가?' '구호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지만, 그 효과는 그저 반짝하고 끝나는 건 아닌가?' '단기적인 집중 구호가 지원 의존심을 높이거나 지역의 장기적인 개발 사업을 방해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도적 지원을 하는 사람들은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 대원과 같다. 일단 불길을 잡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 그 일을ㅇ 하다가 잘 가꾼 꽃밭을 망가뜨릴 수 있고 귀중한 도자기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염려된다고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망가진 꽃밭과 깨진 도자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한다.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의 먼지  (0) 2022.07.31
전영관 - 분갈이  (0) 2022.06.03
우애령박사가 말하는 ‘부부갈등 해결 4가지 키워드’  (0) 2019.05.13
사슴, 꽃, 글  (0) 2017.06.15
아직 다 해보지 않았다  (0) 2017.06.15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0024522



[서울신문]“모든 불만은 바라는 것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불평하는 말투를 요청하는 말투로 바꿔보세요.”지난 9일 오후 ‘부부갈등 해결을 위한 워크숍’이 열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가정법률상담소 6층 강당.30∼40대 주부가 주류를 이룬 70여명의 참석자들이 가정문제상담가 우애령 박사가 제시하는 ‘부부갈등 해결을 위한 제안’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 박사는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W.E.D.P’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W’는 바람(Want)의 약자다. 대부분의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은 내가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갖는 불만이라는 것이다.

●“불평의 말투는 요청의 말투로”

우 박사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저렇게 이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까.’하는 불만이 있다면 그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지 말고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지?”하는 질문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가령 항상 자신만 설거지를 하는 데 불만이 있다면 그대로 “왜 당신은 설거지 한번 하지 않느냐.”고 쏘아붙일 것이 아니라 “오늘은 당신이 설거지를 좀 해 주면 안될까요?”라는 바람을 이야기해 보라는 것이다.

공격적인 말투는 아무리 큰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도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만큼 넌지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면 어떻게 그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절충해 나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행동’의 탐색으로 갈등 원인 찾아내

‘D’는 행동(Doing)이다. 자신의 행동이 관계를 형성하는 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돌아보는 자세를 가지라는 주문이다.‘나는 배우자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나는 배우자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탐색해 보면 갈등의 원인이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 박사는 “상담하러 오는 여성이 남편을 ‘그 인간’이니 ‘저 인간’이니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봤다.”면서 “그런 행동이 하나 둘 쌓이면 자신의 표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그대로 묻어나게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평가’는 부정적 행동 개선의 시작

원본보기

‘E’는 평가(Evaluation)다.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에서 이뤄진 행동에 구체적인 평가를 내려보는 것. 우 박사는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한 자기 평가 점검 기준’을 제시했다.

기준은 비난하기, 탓하기, 불평하기, 잔소리하기, 위협하기, 매수하기 등과 같이 배우자와의 관계를 해치는 행동과 존경하기, 경청하기, 수용하기, 신뢰하기, 격려하기, 타협하기 등 존중하는 행동으로 나뉜다.

이런 목록을 종이에 써둔 뒤 ‘이번 주에는 내가 배우자에게 몇 차례나 이런 행동을 했던가.’를 곰곰히 따져보면 부부 관계의 긍정적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왜 이렇게 집이 더러워?’라고 일갈한 뒤 서로 탓하다 기분이 상한 적이 있다면 경청하기로 바꿔보라는 것이다. 우 박사는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남편도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청소에 나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구체적인 계획짜기로 윤택한 삶 만들기

마지막으로 ‘P’는 계획하기(Plan)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자신의 삶이 즐겁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즐겁기도 어렵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을 짜는데 익숙해져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부 관계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 계획짜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가령 ‘우울증에서 벗어나자.’는 추상적인 계획보다는 ‘당장 오늘 아침부터 집주위를 20분간 산책해 보자.’는 식의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측정가능하고 반복적인 계획을 짜야한다.

가령 ‘사람들과 좀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계획보다는 ‘친한 친구들에게는 일주일에 한 차례는 꼭 안부전화하기’라는 식이어야 한다.

우 박사는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보면 자신의 삶도 변하고 배우자와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연장에서 만난 전용규(40)씨는 “아내에게 내 감정표현이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해 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주부 김우정(39)씨는 “배우자와 성격차는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서로 다른 점을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글 사진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영관 - 분갈이  (0) 2022.06.03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0) 2021.01.15
사슴, 꽃, 글  (0) 2017.06.15
아직 다 해보지 않았다  (0) 2017.06.15
해봐야 알 수 있다  (0) 2017.02.24

서정희 편을 다 보진 않았지만
글로 만난 이 시는 좋았고 슬펐다.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애령박사가 말하는 ‘부부갈등 해결 4가지 키워드’  (0) 2019.05.13
사슴, 꽃, 글  (0) 2017.06.15
해봐야 알 수 있다  (0) 2017.02.24
니어링 부부  (0) 2017.02.24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생활만이  (0) 2017.02.24

'타인의 작품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슴, 꽃, 글  (0) 2017.06.15
아직 다 해보지 않았다  (0) 2017.06.15
니어링 부부  (0) 2017.02.24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생활만이  (0) 2017.02.24
황경신 『밤 열한 시』  (0) 2017.01.29

+ Recent posts